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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뜨거운 열기와 숨이 나도는 코트에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배구공이 코트 바닥에 형편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난 뒤에는 이미 늦은 일이였던 것 같다. 둔탁한 공소리에 이어 누군가에겐 경쾌할 호슬 소리가 길게 퍼졌다. 코트 너머의 환호성과 대조됨에 켄마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지금의 네코마로써 하는 마지막 코트였다.

눈을 뜨면 다시 경기 시작 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들 수고했어.”

 

쿠로오가 여전히 꽤나 의젓한 목소리로 팀원들을 위로했다. 평소와 다름없지만 어스름히 무언가가 올라왔다. 켄마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켄마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떴다.

옆에서는 이미 리에프가 눈물콧물을 다 흘리며 질질 짜고 있었다. 눈물샘에 구멍이라도 난 듯했다. 우리에게는 마지막이지만 네코마에겐 마지막이 아니니까. 마지막까지 의젓한 태도에 훌쩍임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쿠로오의 말이 맞았다. 네코마에겐 마지막 경기가 아니다. 당장 켄마도 아직 내년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쿠로오에겐 아니었다. 야쿠도 같았다. 야쿠는 턱까지 나온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울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고 있었다. 켄마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우는 모습이 꼴성 사나웠던 건지, 자신도 모르게 괜히 눈물이 나려고 해서인지는 본인 스스로도 잘 가늠이 가지 않았다. 켄마는 그저 눈길을 숙였다.

 

아까의 배구공만 받아냈어도 경기는 연장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모두가 울고있는 지금까지도 발버둥치며 공을 받아내려 애썼을지도 몰랐을 시간이었다. 켄마는 내리깔던 눈빛을 거두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모두 수고했다며, 마지막이 아니니 너무 우울해하지 말라는 쿠로오의 마지막 주장으로써의 의젓함이 끝났다. 쿠로오는 잠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땀에 젖은 유니폼을 당겨 얼굴을 쓸어 닦았다. 땀에 젖은 옷으로 땀에 젖은 얼굴을 닦은 쿠로오가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디까지나 켄마의 기준이다만은, 그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인 것같다.

 

“모두들 3년 동안 고마웠다.”

 

고맙다. 낯간지럽지만 진심이 담겨있는 말이였다. 신체 건장한 남학생들끼리 주고받기엔 꽤나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아쉬움이 남아있는 남고생들을 울리기엔 충분한 말인 듯하다. 아예 곡소리를 내며 우는 리에프가 조금은 시끄러웠다. 켄마는 살짝 나올 듯 말 듯 한 눈물을 꾸욱 참고 고개를 푹 숙였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기엔 이미 서로 지나칠만큼 커버렸고, 그렇다고 그냥 아무렇지 않은냥 넘어가기엔 아까 넘기지 못한 공이 후환이 됐다. 켄마는 혼자 쓸쓸하게 앉아있는 것 같았다. 혼자 섞이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쿠로가 다시 한 번 얼굴을 쓸어닦았다. 왜인지 아까보다 더 젖은 얼굴로 한 번 크게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도 찝찝하고 섭섭한 느낌을 넘기지 못했다. 활발했던 장소에서 축 처지고 나른하리만치 젖은 공간으로 오면 그 공간의 모순을 견디지 못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까까지의 일이 웬지 쪽팔리게 느껴지기도 하고, 하루는커녕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일을 마치 몇 년 전의 일마냥 더듬기도 한다. 기대를 하고있던 건 뭔가 공상과 같아서, 잠에서 깬 것같은 기분도 든다. 켄마는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겉멋만 든 수사와 나른함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켄마의 옆에 쿠로오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거슬릴 만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고단했다는 게 느껴졌다. 켄마는 괜히 쿠로오를 눈으로 한 번 훑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는 감정싸움과 기싸움은 피곤하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입는 것도 조금 지나면 금세 귀찮아진다. 무뎌지고 닳아지는 게 아니라, 괜히 발톱을 세우며 남을 깎아내리려는 태도 자체가 귀찮아지고 번거로워진다. 켄마는 배터리가 없어 깜빡대는 핸드폰을 툭툭 쳤다. 게임기도 배터리가 다 닳은 지 오래였다. 모두가 당연시하게 규칙을 따르고 돋보이려 하지만, 혼자 무기력하게 모든 걸 탈피하고 싶어하는 게 얼마나 이단적으로 보이는지 깨달았던 당혹스러운 날들이 있었다. 특별한 아이 한 둘 말고는 모두가 원래부터 그랬다는 냥 무뎌지고 무뎌져 서로에게 묻히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돋보인다는 것, 그것도 딱히 볼 것없는 아이, 특히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아이가 혼자 비위를 거스른다는 건 또래 집단에게 얼마나 기이하고 비이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지 깨달았다. 이렇게 긴 문장과 긴 수사로 떡이 되어있지만 속은 널 마구 비난하고 싶다는 말도 무뎌지게 들어왔다.

 

너무나도 모순되고 지속된 열등의 굴레라 나만 멈춰져있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무언가 끊임없이 하고 발전하는데도 나는 그러지 못한다는 재촉과 무기력의 굴레였다.

 

켄마는 다시 한 번 쿠로오를 쓱 훑었다. 좀 뜬금없지만, 사람의 지지대는 한 가지로도 충분하다. 켄마는 다시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마지막 경기 전 날, 쿠로오는 의외로 당당하게 퇴부한다는 말을 꺼냈다. 뭐 드라마나 영화처럼 이민이나 유학도 아닌 단순히 동아리 퇴부였다. 다신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동아리 시간에만 보지 못하는 것 뿐이였다. 더군다나 쿠로오는 3학년이니까. 오히려 여기까지 끌고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할 처지일지도 모른다. 당한 대로 되갚아주는 것은 무리일뿐더러 일단 아프고 피곤하다. 부활동이지만 세터라는 지위를 갖고있는 배구에서는 다르지만. 조금은 당혹스럽고, 복잡한 감정이 들었지만 이해는 했다. 아마 내일 모래, 늦어도 이번주 말이면 벤치조에서 뽑던, 새 부원을 모집하던 간에 새 미들 블로커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만들다기 보다는 적합한 사람을 찾는다가 더 올바른 말이였겠지만 별 상관 없었다.

 

켄마는 의자를 약간 뒤로 젖히고는 눈을 감았다.

 

 

 

시간은 물 흐르듯 빠르고, 그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빠르게 헤엄치는 물살에 적응하는 수 밖에 없다. 마지막 시합이 끝나고, 눈물겨운 배구부원들과 쿠로오 간의 퇴부 실랑이도 끝났다. 야쿠는 고민 끝에 이제 노력할 대회는 없지만 끝까지 남고 싶다며 퇴부하지 않았다. 의외였다. 솔직히 가장 먼저 퇴부할 줄 알았다면 잘못 파악한 건가. 켄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상온에 둔지 오래된 햄에서 고무풍선 맛이 났다.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냥 맛이 그랬다. 아무래도 상한 것 같아서 반찬통 저 멀리로 치워놨다. 쿠로오는 이제 아무런 부활동도 하지 않고있지만 여전히 같이 도시락을 먹고 등하교 했으며, 가끔씩 배구부 연습을 도와주기도 했다. 입시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많이 도와주진 못했지만. 쿠로오가 앞에서 밥을 먹다가 저 멀리 치워둔 햄을 보고는 젓가락으로 햄을 집었다.

 

“켄마, 편식하면 안 되지.”

 

반 즈음 먹은 밥 위에 햄을 올려두려는 쿠로오의 행동에 켄마가 고개를 냅다 저었다. 거칠만큼은 아니었지만 충분한 의사표현이었다. 켄마의 단호한 행동에 쿠로오가 그러니까 키가 안 크는거야, 라며 햄을 한 입 물었다. 켄마는 상한 거라고 말해두려 했지만 이미 햄은 반토막 나있었다. 분홍색 고무풍선을 씹은 쿠로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켄마는 그러려니 하며 밥을 조금 퍼서 먹었다. 괴상하게 구겨지는 얼굴이 꽤나 비웃어주고 싶게 생겼다고 켄마가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이, 이거 뭔..”

“그 햄, 상했어.”

 

적어도 말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차마 고무풍선맛 햄을 삼키지 못한 쿠로오가 괴상하게 난리를 쳤다. 말하려고 했는데 먼저 먹어버렸잖아, 바보. 딱히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쿠로오는 더 난리를 쳤다. 쿠로 시끄러워. 켄마는 반 먹은 도시락을 뚜껑을 덮어 천천히 정리했다. 중간에 물을 마시는 것도 잊지 않고. 은근적으로 무시당하는 건 불쾌하면서도 딱히 반박하고 걸고 넘어질 말이 없다. 그리고 그게 쌓이다보면 누구에게 무시당하더라도 좋은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의 샌드백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누군가에게 깔보이고 무시당한다는 건 그런거다. 분명히 나쁜 사람인 건 저쪽인데도, 반박할 말이 없어 당하다 스포이트로 내리 찍듯이 불쾌감이나 스트레스를 표출하면 정말 나쁜 사람은 이쪽이 된다. 백번 참더라도 한 번 불쾌감을 드러내면 안 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구석에 박혀있는 쪽이 낫다.

 

비 한 번 안 내린, 쪄죽을 듯한 날씨에서 금방 꽤 쌀쌀해졌다. 이제 아침에는 추워서 긴팔을 찾게 되고, 간간히 외투를 입은 아이들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내년이 가까워졌다. 분명히 어제가 새 날이였던 것 같아도, 눈 한 번 감으면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버린다. 눈물나도록 시린 일이지만 모두에게 여과없이 적용되기에 딱히 불만은 할 수 없다. 늦은 편에 속하는 켄마의 생일도 시시각각 빠르게 찾아왔다. 10월 마지막주의 어느 날이었다. 켄마가 도시락의 반을 비울 동안 반찬통까지 모두 비운 쿠로오가 도시락을 정리했다.

 

“켄마도 곧 생일이던가?”

 

켄마는 나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많은 사람에게 태어난 것을 크게 축하받을 정도의 사람은 극소수지만, 모두에게 생일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게 아무리 볼품없고 비루한 사람이더라도 지겹게도 반복되는 날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와는 반드시 겹친다. 11월달이 다달아오며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맞이해야한다는 게 싫었고, 익숙한 것과 멀어지는 게 싫었으며 그럼에도 그것이 계속 반복되며 낡은 것이 된다는 게 싫었다.

 

생일선물 뭐 갖고 싶은 건 없어? 딱히, 물을 더 마신 켄마가 물통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끝은 모두가 같은데도 더 다른 사람이 되자며 새로운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생일을 축하한다며 관계를 유지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뻔한 금전적 물질을 주고받는 것도 달갑지가 않았다. 시계를 흘긋 본 켄마가 쿠로오에게 손짓했다. 가. 예이, 가겠습니다. 답지 않게 얌전히 간 쿠로오가 이상하면서도 편했다. 쿠로오가 교실에 들어갔을 즈음이 되자 종이 쳤다. 그때서야 분주하게 뛰어들어와 교과서를 꺼내는 아이들이 십사일반이었다. 별 든 것도 없는 책상 속에서 교과서를 꺼냈다. 오늘따라 빨리 떠나는 쿠로오가 조금은 어색했다. 저 멀리서 까다로운 굽소리가 들렸다. 왜인지 수업이 시작해도 집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11월달에 접어들며 쿠로오와는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매달리거나 같이 어울리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은 섭섭하고 슬펐다. 그렇지, 이제 3학년이니까. 3학년이라는 이유로 모든지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님에도 켄마는 납득했다. 멀어진 사람을 붙잡으려 하지 말고 떠나가려는 사람을 원망하지도 말라. 오래 전부터 혼자 마음 속으로 정했던 켄마만의 좌우명이었다. 켄마는 자신을 스치듯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켄마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자신만의 낙원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어디선가 들은 말을 보기좋게 포장한 말이지만 켄마는 그러려니 했다. 언젠간 올 거라고 생각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켄마는 혼자 도시락을 먹고 혼자 하교하는 것에 조금은 느리게 적응해갔다. 늘 옆에서 떠들어주던 사람이 없어지니 당연한 처사였다.

 

켄마는 늘상 혼자면서도 배구부는 꼬박꼬박 출석했다. 변함없이 밝게 인사해주는 것은 야쿠와 리에프 뿐이었다. 자신이 잠시 출석하지 않는 동안 새로운 세터가 뽑혔다. 켄마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슬그머니 물러나졌다. 이제 곧 새로운 인원들로 찰테니 배구부의 분위기를 환기해봤다며 애써 변명해주는 야쿠가 나름대로 고마웠다. 사실 그냥 꼴보기 싫은 눈엣가시를 저 멀리로 치워버린 거나 다름없었지만. 켄마는 배구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반복하다, 결국 퇴부서를 냈다. 어딘가 뚝뚝 끊기고 당황스러운 전개였지만, 그 때도 켄마는 그러려니했다. 퇴부서를 내고 며칠이 지나자 쿠로오가 그동안 도와주지 않던 배구부 연습을 도와줬다. 늘 그러려니했지만 그 때는 조금 상처를 입었다.

 

사람으로부터 입은 상처는 곧 다른 사람으로부터 입은 상처로 덧붙여진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는 게 쉬워진다. 어떻게 해야 상대방이 가장 상처받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시간은 물 흐르듯이 천천히, 또 빠르게 이주가 지나가버렸다. 터무니 없을 정도로 전개속도가 빠른 희곡이었지만 별 상관없는 듯 했다. 켄마는 그 느린 물살에 휩쓸려버렸다. 눈을 뜨고나면 월요일이었고, 눈을 감고나면 그 다음주의 월요일이었다. 가끔씩 쿠로오와 마주칠 때도 쿠로오는 켄마를 못 본 사람인냥 무시했다. 그런 켄마도 쿠로오에게 딱히 아는 체하지 않았다. 떠나가버린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생일선물 갖고싶은 것 있냐는 질문은 이미 흐지부지된 듯했다. 켄마는 조금은 실망했지만 역시나 그때도 그러려니 했다.

 

켄마는 익숙하고도 두렵게 하루를 보냈다.

 

점차 따돌림을 당하는 것으로 소문이 퍼지면서도 그 소문을 해명할 여운이 없었다. 사실 해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졸업하고 며칠 있으면 얼굴도 잊어먹을 애들. 따돌림을 당하는 것도 그러려니 하고 넘길 만 했다. 어찌됐던 남을 까내리는 것에만 흥미가 있어 숨을 쉬는 것만으로 까내리는 애들과는 도통 흥미가 가질 않았다.

 

“왜, 걔있잖아.”

 

혼자 고개 푹 숙이고 다니는 음침한 애. 이제 켄마는 뒷말을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금발머리, 이상한 머리, 이상한 애, 이상한 행동... 켄마의 모든 것에 이상하다는 꼬리표가 붙을 때 즈음, 켄마는 머리를 검은색으로 다시 염색했다. 그리고 살짝 덥던 동복을  벗었다. 마지막 경기가 있던지도 칠개월 하고도 삼일이 지났다. 모두 3학년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졸업이 며칠 앞으로 훌쩍 다가왔다. 켄마는 사실 3학년으로 올라갈 마음도, 올라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유급할 수는 없었으니 그냥 넘겼다. 켄마는 곧 쿠로오가 졸업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어라 대꾸를 해주지 않았다. 원망하지도 붙잡지도 않는다. 마음 속의 좌우명을 너무 잘 지킨 결과였다. 옆 반의 여자 애들이 졸업식 때 축하 공연을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별 관심 없었지만 애들이 하도 중대사라도 되는 것마냥 떠들어대서 그런 듯하다.

 

켄마, 졸업식에 오지 않을래?

 

야쿠에게 받은 문자였다. 야쿠는 여전히 켄마에게 상냥했다. 그게 단순한 인간과 인간으로써의 호감인지, 시혜적으로 베푸는 일말의 동정심인지는 잘 구분이 안 간다. 필경 동정심이겠지. 켄마는 아니, 라는 날카로운 답장을 보냈다. 그 후로는 야쿠에게 더 이상 권유 문자가 오지 않았다. 이상하고 음침한 사람 주제에 동정심이라도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사람을 끊어버렸다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켄마는 동정을 받기 싫었다. 나는 동네북이기 아니니까. 켄마는 빈 문자함을 확인하지도 않고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갔다.

 

켄마의 집에 가려면 터널을 거쳐야한다. 벽에 바다가 그려져 있는 터널이라 모두들 바다터널이라고들 한다. 쿠로오의 집을 가려면 거쳐아하는 관문이기도 해서, 켄마는 가끔씩 쿠로오와 마주친다. 그냥 슬쩍 피해버린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지만. 지금 바다터널에서 마주치면 쿠로오의 옆에는 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일부로 켄마가 보도록 여자친구와 멈춰 서 대화한다는 사실을 켄마는 알고 있다. 그래서 눈길을 주지 않는다. 얄궂은 장난에 얄궂게 대하는 건진 모른다. 다행인지도, 오늘의 바다터널에는 아무도 없었다. 켄마는 핸드폰에만 시선을 고정한 체 앞으로 나아갔다. 켄마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는 찰나, 짝을 이룬 제비 한 쌍이 켄마의 바로 옆을 지나갔다. 신기하게도 제비 날갯죽지에 얼굴이 약간 스쳐지나가자, 헛발질을 하며 땅에 두 다리를 딛었다. 제비 한 쌍이 날아가며 켄마는 운세가 좋을 때도 있다고 생각했다.

 

켄마는 졸업식에 갔다. 정확히는 교문 문턱 앞까지 후드를 눌러쓰고 갔다. 그리고 활기차게 울고 웃는 사람들에게 눌려 다시 교문을 벗어났다. 저 곳에 껴 혼자 이방인처럼 덩그러니 서있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수근대며 비웃을 것 같은 느낌. 쿠로오는 울고 있는 야쿠와 함께 꽃다발을 들고 축하를 받고 있었다. 나같은 사람이 끼면 금방 분위기가 죽이 될 게 뻔했다. 켄마는 그 이질적인 배척감과 너무나도 극적인 분위기에 짓눌려 교문에서 도망쳐나왔다. 내 졸업식에는 모두들 혀를 차겠지. 켄마는 도망쳐나오면서도 웃고 있는 쿠로오의 얼굴을 흘긋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냥 멀어진게 아니라 애초부터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을지도. 켄마는 원망하지도 붙잡지도 말라는 좌우명을 다시 되새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핸드폰이 꺼져버렸다.

 

켄마는 너무나도 빠른 시간 속에 묻혀 어른이 되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빠른 시간이었다. 사실 어른이 되어봤자 달라진 건 머리모양 밖에 없었다. 켄마는 커튼같던 머리를 짧게 쳐냈다. 켄마는 그저그런 어른이 되어 몇 년 전과 다를 바 없는 삶에 꽤나 회의했지만,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라는 말많은 교수의 강의내용에 나름 마음을 놓았다. 켄마는 의미없는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냥 학교에 들어앉아있다 자신을 만만한 사람으로 알아차린 누군가의 질타를 듣고 학교를 나오는 일상이 계속 반복됐다. 자퇴를 고심하며 우편함을 열었다. 이사오고 나서 첫 번째로 꽂힌 편지여서일지도 모른다. 켄마는 조용히 편지를 열어보았다.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손편지였다. 누가 보낸거지. 켄마는 얇은 편지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야쿠 모리스케’

 

누군지 생각하는데 조금 오래걸린 이름이었다. 그 배구부의.., 켄마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커터칼로 편지를 뜯어보았다. 주소는 아마도 고등학교를 수소문해서 찾았겠지. 조금 소름이 돋았다. 끝이 너덜너덜하게 뜯긴 게 조금 마음에 안 들었지만 넘겼다.

켄마는 편지의 내용을 대충 훑어보았다. 그냥 문자나 전화로 하지, 무슨 손편지..

 

‘와줄 수 있을까.’

 

켄마는 편지를 읽다 그만 먹은 걸 토해낼 뻔했다. 쿠로오가 너한테 많이 미안해했다. 널 좋아했던 것 같다. 아아, 불쌍한 쿠로. 어쩐지. 자신은 다른 누군가와도 같아서, 정체성을 깨닫는 데엔 많은 혼란이 일지도 모른다. 야쿠의 편지에도 여러번 썼다가 지운 흔적이 남아있었다. 최대한 쿠로의 혼란스러움을 좋게 포장하려한 노력의 흔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멀지 않았던 학창시절의 쿠로오가 켄마를 보는 눈빛은 혼란이 다분했다. 뒷면에는 쿠로오의 글씨로 생일 축하한다는 글씨가 써져있었다. 켄마는 쿠로오의 모든 것을 용서해줄 수는 없으나 정을 베풀어줄 수는 있었다. 켄마는 눈물을 닦았다. 마음을 보상해주려는 심리인지, 그저 오랜 친구였던 사람의 미안함을 사려했는지는 모른다. 우습게도 원망하지도, 붙잡지도 말라는 좌우명에 막혀 흐지부지 끊겨버렸다. 켄마는 조금 훌쩍거리다 편지를 고이 반으로 접어 책상 옆으로 치워놨다. 원망하고 싶지 않았고 붙잡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고 싶었다.

 

켄마는 너무 많은 질타와 다른 사람의 샌드백 용으로 지쳤다. 켄마는 조금 울었다. 울 기력이 없어지고 나서야 켄마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친구와의 멀어짐은 조금 혼란스러웠을 지도 모른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켄마는 야쿠와 똑같이 답장을 썼다. 언제 샀는지도 모를 편지지 위에다 써본지도 오래된 샤프로 천천히 글을 썼다. 글씨가 점점 흐려졌다. 켄마는 아니, 라는 한 마디를 하지 못해 빙빙 돌려썼다. 피곤했다.

 

미안.

 

켄마는 짧은 다섯 줄의 편지에 마지막에 글씨를 빠르게 썼다. 오래 마주보고 싶지 않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용히 스카치테이프로 편지지를 포장해 우체국으로 갈 체비를 했다. 사실 체비라고 해봤자 주머니의 잔돈, 핸드폰이었다. 거창한 단어에는 거창한 느낌이 난다.

 

켄마는 작은 방에서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해가 짧아져 어둑어둑하게 진 하늘이 보였다. 여름이었다면 해가 있었을 텐데. 켄마는 후드를 눌러쓰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요즘에 우체국까지 가 주고받는 통보라니, 정말 구시대적이기 짝이 없었다. 몇 발자국 돌아다니면 끝인 작은 우체국에는 두 명의 직원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한 명은 가방을 매고 의자를 집어넣고 있었다. 어두운 전등빛에 어둠이 모든 걸 씹어 삼킬 것만 같았다. 어쩌면 묵히고 묵힌 감정과 어둠이 저 편지 한 장에 모두 담아버렸을 지도. 그래서 썩은 내가 여기까지 나는지 모르겠다. 켄마는 직원에게 약간의 돈을 내고 편지를 부친 다음 우체국 밖으로 나왔다. 7시도 안 됐는데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가 귀에 와닿았다.

 

살짝 눌은 눈물을 흘겨 닦고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봤다. 켄마는 아직 체 뜨지 못한 달을 멍하니 쳐다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슬슬 오랫동안 간직한 좌우명을 버려야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켄마는 며칠 후 소포를 받았다. 몇 년 전 켄마가 갖고싶어했던 어느 날의 신작게임이었다.

 

켄마, 생일 축하해.

 

몇 년간 연락이 닿지 않았던 소꿉친구가 죽었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였다고 한다. 켄마의 생일 날이었다.

얌게니님(@ibi0846)

2016.10.16 Happy Birthday to Kenma​

생일 축하해요. - 이소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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